곽요한<관찰자 관찰 ; From bottom to bottom> 7기입주 작가 결과보고전





읽을 수 없는 장면을 위한 변론 : 양효실(미학자) 



누구나 ‘그날’을 갖고/알고 있다. 다시는 전(前)의 무지나 무구함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그날의 모든 ‘나’는 사건의 피해자이고, 동시에 현재가 대신 보낸 목격자이다. 나는 짓밟아도 될 만큼 유약하고 무구한 존재로 그날 선별되었고, 편재하는 폭력의 구조가 설치한 무대의 목격자로 호출되었다. 당사자는 생존자가 되어 이곳으로 돌아와 증언해야 한다. 특정한 이름/자리를 꿰찬 가해자를 고발하기 위해서일 수도, 모든 이름에 들어가 있는 폭력을 성찰하기 위해서일 수도, 폭력의 이면에 놓인 ‘나’의 욕망을 고백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나는 피해자로서의 나의 경험을 말하면서 다시 전의 무지나 무구함을 회복할 수도 있고, 모든 폭력을 성찰하면서 윤리적인 존재가 될 수도 있고, 단지 피해자에 불과하지 않았던 자신을 보는 용기를 통해 자기자신일 수도 있다. 결국 경험이 아니라 그 경험을 말하는 방식/스타일이 말하는 나를 정체화하거나 구성한다는 이야기일 텐 데, 만약 나의 무지나 무구함을 증언한다면 우리의 공감과 집단적 움직임에 기여할 것이고, 폭력의 편재를 성찰한다면 더 힘들고 어려운 실천이 기다리는 것이고, 나의 욕망의 기이한 구조를 발설한다면 청자의 비동일시는 당연하기에 나는 비로소 나로서 존립하면서 일종의 사회적 자아의 해체를 지금 다시 겪을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나도 감당할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무수한 다른 방식/스타일/길이 과거의 경험과 그 경험을 말하는 현재의 ‘관계’를 통해 제시되었을 것이고 제시될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정확하게 심지어 올바르게 말한다는 것은 무엇이고 왜 그런 일은 일어나는가? 자신의 진실을 말하는 것은 지지와 동의를 얻기 위할 때도 있을 것이지만 더 위험해지고 더 고립되는 일일 수도 있다. 나는 어디까지 나에 대해 말함으로써 나의 말하기의 사회성을 획득하면서 동시에 나의 사회성을 위태롭게 하는가? 혹은 할 수 있는가? 사회적 인정을 얻기 위한 말하기는 나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기술에 나를 옭아매는 소외일 수도, 나만큼 위태롭고 고독한 사람에게 보내는 최후의 신호일 수도 있다. 그래서 누군가의 말하기는 없는 자리를 더 지우는 부정성의 실천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진실을 말하려고 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다. 그것이 나를 위한 어떤 자리도 보유하지 않은 사회에서 나를 짓누르고 부정하지 않는, 그들이 내게 저지른 폭력을 이번에는 내가 나에게 저지르지 않겠다는 의지, 결단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나는 자기연민으로 가득 찬 말하기를 통해 집단적 사회의 폭력적인 공동체성에 다시 또 짓밟힐 수도, 거의 대부분이 공감/동일시할 수 없는 말하기를 통해 어떤 폭력에서도 안전한 자리는 없다는 것을 증언하는 배덕자(背德者)일 수도 있다. 다름아닌 내가 이 사회의 잔인함, 폭력의 바깥은 없다는 것을 증언하는 당사자-목격자의 자리, 없는 자리를 독점한다. 자기자신을 경유해서 버젓한 사회의 잔인함을 드러내는, 어떤 인정과 지지도 불가능한 자리가 바로 그런 잔인함의 구조를 관찰하는 외로운 사람의 자리임을 공표하는 것.


이번 전시에 대한 작가 곽요한의 글쓰기는 그렇게 자기자신에 대해 진실을 말하고 있다. 그의 글쓰기는 ‘디나이널 게이의 커밍아웃’이란 너무 기이하고 낯선, 하지만 유일무이한 자의 자기-희생-제의를 성취한다. 그는 기존의 게이 커뮤니티를 인정하고 그곳에 소속되려는 회원의 자기표명에서 이탈한다. 남성에 대한 선망과 공포 사이에 사로잡힌 그의 신체의 사실을 자신의 개인적 경험에 단단히 부착시키면서 누구도 동일시하거나 공감할 수 없는, “어디에도 자리잡지 못한 개인”이라는 엄연한 자기진실을 공표한다. 그는 그렇게 유일무이한 자기 자신을 글쓰기로 육화한다. 기존의 억압적인 사회도 해방적인 사회도 그를 위한 자리는 아니라는 점에서 그의 신체를 위한 자리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자신을 잃고/잊고 이미 마련된 자리에 착석하는 이미 항상 설치되어 있는 사회성의 무대로 올라갈 수 없다. 그는 자기 자신과 함께 있을 뿐, 자기 자신임의 피로나 고통을 양도할 공통성에 입회할 수가 없다. 그의 글은 감정과 온도인 신체로는 반응하기 어렵다. 그의 자기-분석은 신체에 대한 것이면서도 보호막이 제거된 신체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부의 디아스포라, 자기 신체에 갇힌 자, 알아봐줄 사람을 찾을 수도 없을 만큼 자신에게도 낯선 자, 관찰자를 관찰하는 시선인 자, 도통 불쌍한 자로는 보이지 않는 자, 불운과 불행 사이에서 자기 자신이 되어버린 자,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은 화해불가능한 채로 자신과 함께 견디는 것임을 결국 납득한 자, 결국 자신을 포함한 “실패자들을 위한 도피처”를 상상하는 쪽으로 움직이려는 자.


요한은 줄곧 자신을 관찰자라고 부르며 작업을 해왔다. 2014년 개인전 《관찰자 곽요한》을 위한 작가의 글에 등장했던 “그들을 지켜보는 나의 시선과 작업”과 “지켜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그 공간을 기억”하는 작업이란 문장은 그가 자신에게 수여한 사회적인 이름인바 ‘관찰자’, 보는 주체와 보이는 대상의 관계 바깥의 자리, 보이는지 안-보이는지 확인할 수 없는 자리, 상징적인 은유로는 가시화/전유할 수 없는 자리의 이미지를 통해 드러났다. 그의 ‘풍경’은 읽을 수 없는, 이해불가능한 구성으로 채워진다. 그는 자신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 수 없다. 그것이 그의 진실이다. 그래서 관객은 작가의 풍경을 오직 볼 수 있을 뿐이다. 견고한 구조물들이 있고 게이 신체의 비천함을 모호하게 번역한 더러운 하수구의 물이나 불길한 분홍색이 나타날 뿐이다. 작가의 신체, 혹은 욕망은 공동체적 합의로서의 은유 앞에서 머뭇거릴 뿐 기꺼이 그것으로 편입, 동화되지 못한다. 그는 그를 냉대하는 사회와 유혹하는 사회 사이에서 어정쩡한 채로 자신과 공존한다. 그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하는 ‘관계’에 출연하기 전(前)에서 자기 자신을 보고 있다. 그는 자신을 학대하는 것인가, 자신을 보호하는 것인가. 자신을 학대하는 자는 타인을 학대하길 거부한다는 점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자는 자신의 사회성으로 넘어가길 거부한다는 점에서 이미 어떤 ‘행위’를 선택한 자이다.


자신의 전시를 ‘관찰자 관찰: from bottom to bottom’이라고 지은 작가의 자기분석은 계속 실패하는 자들이 성공한 자들의 이면을 목격하는 자들이라는 윤리적 언명도, 실패하는 자들의 ‘성소’인 예술에 거주하는 자신에 대한 자긍심도 확보하지 않은 자의 담담한 자기이해를 드러낸다. 이 글을 쓰는 나는 작가의 고백, ‘커밍아웃’에도 불구하고, 그의 고립과 모순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음에도 그의 작업을 분석할 ‘능력’이 없다. 작가는 자기자신을 이해가능한 사람, 알아볼만한 사람으로 풀어내는 작업과 타협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날’을 암시하지만 그것을 외부로 유출하려고 하지는 않는 것 같다. 아직 그곳에 있기 때문이고, 그곳을 이해가능하게 폭로함으로써 그곳에 대한 현재의 개입이나 승리를 주장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좋은’ 관찰자가/도 아니다. 그렇게 된다면 이미 그는 충분히 냉대하는 사회나 매혹하는 사회에 속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실재’의 상징화를 거부하는, 외상의 은유화에서 도피하는 자이다. 그는 의식의 개입과 기억의 서사화 앞에서 아직도 머뭇거린다. 그것이 ‘바닥에서 바닥으로’ 흐르는, 충분히 더럽지 않고 충분히 고발도 아니고 충분히 증언도 아닌, 신중하게 구성되었지만 숨은 의도는 읽을 수 없는 작가의 장면을 충분히 읽을 수 없는 내가 읽었다고 말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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